*** 프롤로그
별도 달도 없는 깜깜한 밤하늘 아래 한 여자가 서 있다. 붉은 자줏빛 기모노를 입은 몸집이 큰 여자다. 머리칼은 눈처럼 새하얀데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통통하다.
여자는 휘이익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묵직하게 땅을 딛고 서 있다.
그때 여자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호리호리하고 키가 큰 남자다. 끝도 없이 높은 실크해트를 쓰고 검은 망토를 걸쳤다. 머리는 말끔하게 빗어 넘기고 수염 끝은 뾰족하게 매만졌는데 잘 익은 딸기처럼 붉은 빛깔이다.
겉보기엔 점잖은 신사 같지만, 교활해 보이는 웃음이 얼굴에 배어 있어 왠지 미심쩍은 분위기를 풍긴다.
남자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헤헤헤, 용케 와 주셨습니다요.”
“결투 신청을 받은 이상 빼고 있을 수만은 없지요.”
여자는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보다 카이도 씨, 저와 승부를 겨루고 싶었으면 직접 오셔서 말씀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비신사적인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요.”
“헤헤헤. 저야 뭐, 되도록 귀찮은 짓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말입지요. 그러니 좀 봐주십시오.”
“부탁을 받았다니…… 혹시 〈화앙당〉의 요도미 씨가 부탁하던가요?”
“딩동댕, 정답! 요도미 씨는 지금 옴짝달싹 못 하고 있지요. 그래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답니다. 뭐, 상상은 되시겠지요?”
“…….”
“쳇! 당신이 그렇게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니 요도미 씨도 발끈해서 더 정색하고 달려드는 거 아닙니까. 진심으로 승부를 펼친다면 요도미 씨의 기분도 한결 나아질 텐데요.”
“그보다 이야기나 마저 해 보시지요. 움직일 수 없는 요도미 씨를 대신해서 이번에는 카이도 씨, 당신이 이 베니코와 승부를 겨루겠다는 뜻인가요?”
바로 맞혔다는 듯이 남자는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네에, 네에. 저야 뭐, 딱히 당신한테 원한은 없지요. 다만 요도미 씨는 저에게 〈악귀 뽑기〉를 주기로 약속했답니다. 그것도 일곱 가지 모두 다 말입죠. 요도미 씨는 그걸로 과자를 만들어서 제 놀이공원의 기념품 가게에서 꼭 팔고 싶다고 했거든요. 그러니 저야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하고 승부를 겨룰 수밖에 없다니까요.”
“…….”
“아,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요도미 씨가 〈화앙당〉의 과자를 맘대로 가져다 써도 괜찮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조그만 장난감 같은 거야 제가 직접 구해 올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과자 대 과자로 겨룰 수 있다는 뜻입죠. 그러니 결투 한판 벌여 봅시다. 어떻습니까?”
“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베니코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요도미 씨에게도 말했습니다만, 우리 〈전천당〉은 운을 시험하는 가게입니다. 애초에 승부 따위를 겨루는 가게가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제가 미리 다 생각해 둔 게 있습죠.”
남자는 집게손가락을 꼿꼿하게 세워 보이며 말했다.
“한 달! 딱 한 달만 〈전천당〉에 우리 과자를 맡겼으면 하는데요.”
“우리 가게에 당신네 과자를요?”
“네에, 네에. 그런 다음 〈전천당〉을 찾은 행운의 손님 중에 과연 몇 명이 우리 과자를 고르는지, 과연 행운의 동전 몇 개가 제 손에 들어오는지 헤아려 보는 겁니다. 물론 행운의 동전을 더 많이 손에 넣은 쪽이 이기는 거지요. 자, 어떻습니까?”
“으음, 그렇군요. 그런 방식 또한 넓게 보자면 운을 겨루는 셈이니…… 운을 시험한다는 우리 가게의 취지를 망치는 일은 없겠습니다만!”
“바로 그렇죠. 어떻게…… 해 보시렵니까?”
“……좋습니다.”
베니코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특별 판매를 한다며 그쪽 과자를 내놓으면 되겠지요? 행운의 손님이 어느 쪽 과자를 선택하실까요? 그건 〈전천당〉의 주인인 저도 흥미진진합니다. 어느 쪽 과자를 골라 운을 잡을지, 아니면 놓칠지. 후후후, 그거 꽤 재밌겠는걸요.”
“헤헤, 다행히 구미가 당기시는 모양입니다.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과자를 들여놓겠습니다.”
빨간 수염의 남자는 히죽 웃었다.
***

소이치로는 세상에 참 별별 이상한 사람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이처럼 절대로 지기 싫어하는 면이 있다고도 생각했다.
소이치로는 65세다. 정년퇴직을 했으니 이제 아침 일찍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덕분에 날마다 느긋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슬슬 물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소이치로는 집 근처 기원(일정한 금액을 내고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장소)에 다니고 있다. 예전부터 장기 두는걸 좋아했고, 다른 사람과 장기 겨루는 것도 재밌었다.
기원을 들락거리다 보니 점차 실력도 늘고 친구도 여럿 생겼다.
그러나 기원에서 생긴 건 친구만이 아니다. 경쟁자도 나타났다.
바로 고사카라는 남자다. 그는 소이치로와 동갑이다.
오랜 기간 은행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니 흔히 말하는 엘리트다. 그런데 이자가 하는 짓이 매우 밉살스럽다. 자기 장기 실력을 뻐기면서 깐족깐족 상대편을 깎아내린다.
늘 이런 식이다.
“이래 봬도 내가 왕년에 프로로 데뷔할 뻔했단 말씀이지. 그러니까 아마추어는 나한테 상대가 안 된다고.”
“나한테 졌다고 그렇게 억울해할 거 없네. 뭐, 실력이랄까? 타고난 재능이 차이 나는 걸 어쩌겠나.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거야.”
“고작 그 실력으로 용케 나한테 도전하는군그래. 아무튼 생초보들이 이렇다니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을 이럴 때 쓰던가? 핫핫핫!”
“어허, 말을 그렇게 쓰면 되나! 장기가 뭔지 당최 모르는군. 나 원, 한심스러워서야, 쯧쯧!”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사카는 정말로 강하다. 아마 이 기원에서 장기 실력은 최고일 것이다. 소이치로는 왕이라도 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고사카가 진심으로 싫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사카를 이기고 싶었다. 졌을 때의 얼굴을 딱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소이치로는 의지를 불사르며 도전하지만 여지없이 지고 만다.
“허엇, 소이치로 씨도 참! 둘 때마다 지는 거 지긋지긋 하지도 않아요? 내가 맨날 이겨 버리니까 오히려 미안할 지경이네. 하하하하!”
고사카는 비아냥거렸다.
소이치로는 정말이지 분하고 분했다. 우쭐대는 그 얼굴을 떠올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다.
“고사카, 이 자식을 그냥!”
소이치로는 이를 빠드득빠드득 갈았다.
‘이기고 싶다. 어떻게든 고사카를 이기고 싶어.’
기원을 향해 걸어가는 내내 소이치로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문득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골목이 보였다. 어둑어둑하고 좁은 길이 안으로 쭉 이어졌다.
소이치로는 왠지 모르게 그 길로 가고 싶어졌다.
‘지름길일지도 모르잖아. 그래, 아마 그럴 거야.’
소이치로는 늘 다니던 길이 아닌데도 골목으로 발길을 옮겼다. 가면 갈수록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갈 뿐 큰 길이 나올 기미는 영 보이지 않았다.
‘지름길은커녕 길을 잃어버리는 거 아냐?’
그렇게 생각했을 때, 앞쪽에 과자 가게가 보였다.
‘이렇게 인적이 드문 곳에 가게를 내다니, 정말 기이하군. 손님이라곤 거의 안 올 것 같은데…….’
소이치로는 고개를 갸웃하며 과자 가게로 다가갔다.
가게 앞에는 과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어둑어둑한 골목 안에서 과자들만 반짝반짝 빛났다. ‘전천당’이라고 새겨진 간판은 어지간히 낡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또 그럴싸했다.
과자와 장난감 들을 보자 소이치로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하기는 어렸을 땐 동전을 쥐고 이런 가게로 냅다 뛰어가서 뽑기도 곧잘 하고 그랬지…….’
그때의 설렘이 오랜만에 되살아났다.
‘어디, 뭐라도 하나 사 볼까?’
소이치로는 어느새 장기도, 고사카도 모두 잊고 잰걸음으로 가게 문턱을 넘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생전 본 적 없는 과자들이 가게가 비좁을 정도로 꽉 들어차 있었다. 입구 근처에 있는 냉장고 안에도 가지각색 음료수가 잔뜩 줄 맞춰 있었다.
소이치로는 아이처럼 쪼그려 앉아 뭘 고를지 훑어보았다. 〈락락 다식〉, 〈여행 떠나과자 ‐ 수프 맛〉, 〈아귀 계피 사탕〉, 〈방치 팬케이크〉, 〈가벼운 양갱〉, 〈질투 과자〉, 〈의욕의 불사탕〉, 〈지혜 콩과자〉 등.
이것도 저것도 다 매력이 넘친다. 〈댄디 캔디〉가 눈길을 끌었지만 〈남자다잉 우유〉도 단념하기는 아쉬웠다.
‘흐음, 어쩐다? 고민하지 말고 전부 다 사 버릴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쩐 일인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과자들이 심사숙고해서 제대로 고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소이치로는 가게 안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거야!’라고 할 만한 과자를 찾아냈다.
투명한 봉지에 포장된 까무잡잡한 막대기같이 생긴 과자다. 과자 굵기는 손가락만 하고, 길이는 20센티미터 정도 되어서 제법 컸다. 과자 봉지에는 새빨간 글씨로 ‘끝내 웃어봉’이라고 쓰여 있다.
“오호라! 이 과자는?”
이런 과자라면 어렸을 때 자주 먹었다. 달짝지근하면서 소박한 맛이 좋았다. 그런데 지금 이 〈끝내 웃어봉〉에서 뭔가 강렬한 느낌이 전해진다. 어쨌든 갖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다. 이걸 원한다고 마음이 소리친다.
소이치로는 자기도 모르게 팔을 쭉 뻗었다. 그 순간, 매력적인 또 다른 과자 하나가 눈에 쏙 들어왔다.
그 과자는 500엔짜리 동전 크기에 쪼글쪼글하고 칙칙한 오렌지색을 띠고 있다. 아무래도 말린 과일 같았다.
그런 것들이 큼직한 병에 가득 들었다. 병에는 ‘불패 건살구’라고 적힌 스티커가 척 붙어 있다.
소이치로는 이 과자도 엄청나게 갖고 싶었다.
‘흐음, 이것도 〈끝내 웃어봉〉 못지않게 근사하구나. 뭐가 더 좋을까?’
둘 다 갖고 싶었지만, 하나만 골라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고민하고 있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원하시는 것을 찾으셨나 봅니다.”
돌아보니 가게 안쪽에서 한 여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씨름 선수처럼 몸집이 큰 여자다. 얼굴은 젊은데 머리카락은 새하얗고 알록달록한 유리구슬이 달린 비녀를 여러 개 꽂았다. 옛날 동전 무늬가 새겨진 자주색 기모노를 입고 있는데, 어쨌든 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멈칫하는 소이치로를 보고 여자가 빙긋 웃었다.
“〈전천당〉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행운의 손님. 〈끝내 웃어봉〉을 사시겠습니까?”
“아, 아니, 그게, 저…… 망설여져서요.”
“망설이신다고요?”
“음, 이 〈불패 건살구〉도 좋아 보이는군요.”
여자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급하실 것 없지요. 충분히 고민하신 다음 마음에 드시는 걸 선택해 주십시오.”
“흐음……. 뭘 고르는 게 좋을지 조언해 주시겠소?”
“아닙니다. 선택을 하시는 건 손님이십니다.”

“허, 그렇군요. 그렇겠……지요. 좋아, 정했어요. 〈끝내 웃어봉〉으로 하겠소.”
소이치로가 그렇게 말하자 여자는 흡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가격은 50엔입니다.”
소이치로는 주머니를 뒤졌다. 잔돈은 생기는 대로 주머니 속에 쑤셔 넣는다. 덕분에 쩔렁거리고 무겁지만 바로 꺼내 쓰기에 수월하다.
이번에도 재빨리 50엔짜리 동전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동전이 아닙니다. 다른 50엔으로 주시겠습니까?”
“다른 거요?”
“네, 2015년에 발행된 동전으로요. 갖고 계실 겁니다. 틀림없이요.”
소이치로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머니 속 동전을 전부 다 꺼냈다. 찾아보니 정말 있었다. 2015년에 발행된 50엔짜리 동전. 그 동전을 내밀자 여자가 이번에는 받아 주었다.
“네에, 네에. 틀림없이 오늘의 동전입니다. 여기 〈끝내 웃어봉〉을 받아 주십시오.”
“고마워요.”
좋아하는 소이치로를 보고 여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승부란 끝날 때까지 알 수 없는 법. 그래서 더욱 흥미롭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네엣? 그게 무슨 소리요?”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부디 우리 상품에 만족하시면 좋겠습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끝내 웃어봉〉을 손에 넣었다. 소이치로는 절로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과자 가게에서 나왔다.
그대로 조금 더 걸으니 어이없게도 바로 큰길이 나타났다. 코앞에 기원이 보였다. 그곳에 고사카가 있다. 결코 좋아할 수 없는 경쟁자는 오늘도 히죽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 웃는 얼굴을 납작하게 눌러 주고 싶군!’
불끈불끈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 손아귀 안에서 〈끝내 웃어봉〉이 묵직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이치로는 〈끝내 웃어봉〉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과자 가게 밖에서 보니 한층 더 마음에 들었다.
포장 뒷면에 작은 글씨로 뭐라고 적혀 있었다.
〈끝내 웃어봉〉
승부라는 것은 끝이 중요한 법! 마지막에 웃는 자가 결국 다 이긴 셈입니다. ‘끝내 웃어봉’은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되는 순간, 당신에게 승리를 안겨 줄 것입니다.
‘좋았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때라는 거지!’
소이치로는 웃었다. 무턱대고 믿는 건 아니지만 어쩐지 재수가 좋을 것만 같다.
‘기원에 들어가기 전에 〈끝내 웃어봉〉을 먹어 두는 게 좋겠어.’
소이치로는 전봇대 뒤편에 기대어 서서 포장을 뜯어 과자를 한 입 깨물었다.
와사삭.
“후우!”
가볍게 바스러지는 식감과 더불어 달달한 맛이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아아, 향긋한 단맛이 말도 못하게 맛있구나! 게다가 입에서 눈처럼 사르르 녹는 맛도 일품이야.’
제법 큰 과자였지만 소이치로는 덥석덥석 다 먹어 치웠다. 정신없이 과자를 먹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른다. 다먹고 나니 좀 창피한 것도 같았다.
“허허, 요것이 이렇게 맛있을 줄 알았으면 하나 더 살걸. ……으음, 응?”
소이치로는 놀랐다. 불쑥 몸에 기운이 넘쳐 났다. 동시에 마음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승부를 겨루고 싶어! 장기 시합을 해야겠어!’
소이치로는 콧숨을 쉭쉭 내쉬면서 성큼성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고사카는 벌써 와 있었다. 그는 “또 왔네!”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소이치로를 보자마자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고사카의 시건방진 표정을 본 소이치로는 평소라면 열불이 치밀었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기가 진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인지 마음이 여유로웠다. 고사카의 비웃는 얼굴이 오늘따라 유난히 작고 좀스러워 보였다.
소이치로는 고사카에게 슬쩍 웃음을 보냈다.
“한 판 부탁합니다, 고사카 선생.”
“당신도 참 끈질기네요. 좋습니다, 어험.”
소이치로는 한결같이 밉살스럽게 말하는 고사카와 마주 앉았다.
승부가 시작되었다.
소이치로는 처음부터 온 힘을 다해 장기판의 말을 움직여 나갔다. 먹잇감을 덮치는 사자와 같은 기세로. 반면, 고사카는 얍삽 빠르게 요리조리 피하며 소이치로의 힘을 야금야금 빼놓았다. 금방이라도 소이치로가 질 듯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사카 얼굴에 히죽 얄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제길! 역시 못 이기려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 고사카가 실수를 했다. 그것도 어처구니없이 큰 실수다. 소이치로의 상(코끼리 상 ‘象’ 자가 새겨진 장기짝. 앞으로 세 칸, 옆으로 두 칸 건넌다)이 먹힐판인데 먹지 않고 차(수레 차 ‘車’ 자가 새겨진 장기짝. 일직선으로 몇 칸이든 움직인다)를 움직여 버린 것이다.
순간 고사카의 얼굴빛이 파래졌다. 그럴 만도 하다.
평소라면 절대 그런 수를 두지 않았을 테니까.
“어, 어째서 이런 실수를…….”
“좋았어!”
소이치로는 곧바로 고사카의 차(車)를 잡았다.
그때부터 형세는 뒤집혔다. 소이치로는 고사카의 말을 하나씩 하나씩 잡아 나갔다. 고사카는 안절부절못했다. 다시 판을 뒤집어 보려고 애썼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실수가 잦아졌다. 소이치로는 고사카의 실수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확실하게 숨통을 죄어 갔다.
점점 수세에 몰리던 고사카는 마지막에 가서는 벌벌 떨었다.
그리고 마침내…….
“져, 졌어요…….”
고사카는 모기가 앵앵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이치로가 이긴 것이다.
“이겼다!”
기쁜 나머지 소이치로가 무심결에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어느새 기원에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고서 숨죽인 채 대국을 지켜본 모양이다.
“굉장했어요, 소이치로 씨!”
“그렇게 몰려 있었는데 용케 뒤집었네요!”
“이야, 고사카 씨를 무너뜨릴 사람은 역시 소이치로 씨 뿐이라니까요!”
저마다 한마디씩 칭찬을 하자 소이치로는 하늘로 둥실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고사카의 얼굴! 자기의 패배를 못 믿겠다는 듯이 점차 창백해지면서 굳어 버린 얼굴.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미 기분이 최고였다.
쓱 둘러봤더니 고사카가 슬금슬금 도망치려는 참이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소이치로는 “흐응!” 하고 코웃음을 쳐 주었다.
그날 이후 고사카는 기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무시하던 소이치로에게 져서 부끄러웠을 것이다. 소이치로는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더 이상 안 봐도 되어 속이 후련했다.
게다가 고사카가 기원에서 자취를 감추자 자연스럽게 소이치로는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여러 도전자가 “한판 두실까요?”라며 소이치로를 찾았다. 소이치로는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 자기보다 수준 높은 상대한테도 반드시 이겼다.
더 이상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이라고 여기긴 어려웠다. 소이치로는 〈끝내 웃어봉〉의 힘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과자를 먹은 덕분에 계속 이기는 게 틀림없으며, 몇개 더 샀어야 했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 번도 지지 않고 계속 이긴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른다. 같이 장기를 두던 상대가 “한 수 배웠습니다.”라고 인사하면 소이치로는 자기가 자꾸 더 위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소이치로는 점점 우쭐해졌다.
‘내가 말이야, 좀 대단하지. 절대 지지 않잖아. 하하하!’
소이치로는 흐뭇해하면서 날마다 기원에 나갔다.
한참 지난 어느 날.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소이치로에게 도전해 왔다.
“할아버지, 저랑 장기 한판 두실래요?”
“아, 그래. 좋지!”
똘똘해 보이는 아이다. 한 초등학교 4학년쯤 됐을까?
‘녀석, 참 당차군. 이런 꼬맹이라면 식은 죽 먹기지. 아니, 아니야. 곧이곧대로 몰아붙이면 불쌍하니까 처음엔 좀 살살 둬야겠다.’
소이치로는 건성건성 상대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만 소이치로가 지고 만 것이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패배, 완패다.
소이치로는 어안이 벙벙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연히 이기는 승부였는데 내가 지다니! 이제 〈끝내 웃어봉〉의 효과가 사라진 걸까? 아냐, 〈끝내 웃어봉〉을 먹기 전에도 이런 꼬맹이한테 질 실력은 아니었어. 도대체 왜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소이치로는 부끄럽다 못해 불쾌해졌다. 고사카한테 내리 졌을 때보다 더 창피했다. 참을 수가 없어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그런데 곧 누군가 그를 불러세웠다.
“헤헤헤. 어르신, 망신스러운 일을 당하셨군요.”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모습이 하도 기묘했던 터라 소이치로는 그가 코미디언이나 뭐 그런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일 거라고 짐작했다.
큰 키에 검은 망토를 걸치고 높은 실크해트를 썼는데 머리카락과 수염은 빨갛게 물들였다. 히죽히죽 웃는 모습이 어쩐지 께름칙했다.
‘아니, 이 남자도 내가 지는 걸 본 거야?’
귀까지 새빨개진 소이치로에게 남자는 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까 그 승부 말입죠. 그건 어르신 탓이 아닙니다. 먹은 과자, 그게 좋지 않았던 것입죠.”
“다, 당신…….”
“아, 예에. 알고 있습죠. 어르신께서 〈끝내 웃어봉〉을 드셨다는 걸요. 그런 과자를 드시는 게 아니었습니다요. 그건 늘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뭐라고요?”
“아이고, 저런! 역시 착각하고 계셨군요. 〈끝내 웃어봉〉이란 과자는 아주 열심히 승부를 겨뤄야만 가까스로 이기게 해 주거든요. 방심하거나 건성으로 승부를 겨루면 힘을 발휘하지 않습죠.”
“그, 그게 정말이요?”
소이치로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생각했다.
‘그렇구나. 그래서 진 거로구나. 그 아이와 진지하게 겨루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비참하게 질 건 뭐람? 그건 너무했다고!’
〈끝내 웃어봉〉이 원망스러웠다.
그 순간 남자가 히죽 웃었다.
“어르신 같은 분한테는 〈불패 건살구〉를 권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건 이름 그대로, 먹으면 절대 지지 않는 과자거든요.”
“앗!”
생각났다. 〈불패 건살구〉! 소이치로가 그 이상한 과자 가게에서 〈끝내 웃어봉〉만큼이나 가지고 싶었던 과자다.
‘뭐야, 역시 그걸 골라야 했었어!’
남자는 억울해하는 소이치로에게 속삭였다.
“그 과자 가게에 다시 가 보십시오. 오늘 어르신의 운이 아주 좋으니 분명히 그곳에 가실 수 있을 겁니다요.”
남자의 눈이 수상하게 번득였다. 위험한 느낌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불패 건살구〉가 갖고 싶어서 소이치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과자 가게…… 어디 있었더라?”
“아, 저기 골목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곧장 가면 나타날 것 같은뎁쇼.”
소이치로는 남자에게 가볍게 인사하고는 골목으로 급히 걸어갔다.
한참 가다 보니 과자 가게가 보였다. 〈전천당〉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좋았어!”
소이치로는 과자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에는 저번에 봤던 커다란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놀란 표정으로 소이치로를 쳐다보았다.
“어머나! 이게 웬일이랍니까? ……이런 흔치 않은 일도 다 일어나는군요. 지난 행운의 손님이 우리 가게에 또다시 오실 줄이야…….”
그러나 소이치로에게 여자의 혼잣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다.
“〈불패 건살구〉는 어디 있소? 아직 있겠지? 부탁이에요. 제발 있어야 해!”
기도가 통했다. 〈불패 건살구〉가 잔뜩 담긴 커다란 병이 지난번하고 똑같은 자리에 놓여 있었다.
“다행이군!”
소이치로는 〈불패 건살구〉를 가리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거! 이거 주시오!”
“이것 참……, 〈끝내 웃어봉〉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셨습니까?”
“만족하지 못했으니 또 온 것 아니겠소! 됐으니 얼른 이거나 주시오!”
“……네, 네.”
여자는 체념한 표정으로 병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집게로 〈불패 건살구〉 한 알을 집어 올렸다.
“더 주시오, 더. 한 열 개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딱 한 개씩만 팔도록 정해져 있으니까요. 게다가 하나면 충분합니다.”
“별수 없지. 얼마요?”
“1엔입니다. 단, 1984년에 발행된 1엔짜리 동전으로 주셔야 합니다.”
소이치로는 속으로 또 영문 모를 소리를 늘어놓는다고 구시렁거리면서도 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찾아보니 정말 1984년에 나온 1엔 동전이 있었다.
소이치로는 여자에게 동전을 건네고 〈불패 건살구〉를 받아 들었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듣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골목을 나오면서 소이치로는 〈불패 건살구〉를 입 속에 털어 넣었다. 말린 살구는 달고 씨도 없었다. 그러나 목 안으로 삼킬 때 아주 잠깐 쌉싸름했다. 먹어서는 안되는 걸 삼킨 듯 개운하지 않은 뒷맛에 소이치로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 어때? 괜찮아. 이걸 먹으면 절대 지지 않는다는데 그런 사소한 것쯤이야 신경 쓰면 안 되지. 그보다 이제 효과가 있을까?’
소이치로는 얼른 시험해 보고 싶어서 기원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몇 달 뒤 공원 벤치. 소이치로가 멍하니 앉아 있다.
그는 한참 동안 기원에 나가지 않았다. 〈불패 건살구〉 효과를 보지 못했을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불패 건살구〉를 먹은 소이치로는 장기를 어떻게 둬도 절대 지지 않았다. 말을 적당히 움직여도, 일부러 지려고 해도 두는 족족 무조건 다 이겨 버렸다.
처음에는 소이치로도 신이 나서 참 멋진 일이라며 좋아했다.
그러나 기쁨은 금세 사라지고 점점 시들해졌다. 소이치로는 장기 승부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해도 이긴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 가슴이 두근거릴 일도, 초조할 일도 없었다.
소이치로는 너무나 시시하고 따분해서 장기를 그만두고 바둑을 시작했다. 그러나 바둑을 둘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이제 막 바둑을 시작한 생초보 소이치로가 선생님들을 쉽게 이겨 버렸다.
트럼프, 체스, 다트, 당구 등등 두루두루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하든, 누구와 하든 절대 지지 않았다.
‘아, 따분해…….’
소이치로는 마음 깊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일이 없어 한가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 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아아, 왜 이렇게 지루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불패 건살구〉를 먹지 말걸.’
벤치에 앉은 채 소이치로는 그저 후회에 후회를 거듭할 뿐이었다. 그것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