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북

 *** 프롤로그

과자 가게 〈전천당〉의 주인 베니코가 커다란 여행용 가방에 과자와 장난감 들을 부지런히 채워 넣고 있다.

 

그런 베니코를 조그만 금색 마네키네코들이 둘러싸고 있다. 차례로 과자를 나르며 짐 싸는 걸 돕는 마네키네코들이 있는가 하면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하는 마네키네코들도 있다.

 

마침내 커다란 가방이 빈틈없이 꽉 찼다.

 

“됐습니다. 〈바이바이 파이〉도 챙겼고, 〈젠틀 젤리〉와 〈근육질 라테〉도 넣었사옵니다. 행운의 손님을 고를 팔각 상자도 넣었으니 이 정도면 됐사옵니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다녀오겠사옵니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베니코에게 마네키네코 하나가 물었다.

 

“냐아?”

“언제 돌아오냐고요? 쪽지를 보낸 S, 그러니까 세키노세 씨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사옵니다만, 도무지 믿고 싶지가 않더군요. 〈전천당〉을 망하게 하려는 연구소가 있다니, 기가 막혀서!”

“냐냥 우냐앗?”

“아닙니다. 세키노세 씨가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사옵니다. 그래도…… 어찌 됐든 미리미리 대비해야 좋지 않겠습니까. 일단 가게 문은 잠시 닫고, 예전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장사를 해 볼 생각입니다. 가게가 닫혀 있으면 연구소인가 뭔가 하는 곳에서도 포기할지 모르고요. 무엇보다 우리에게 손님을 보낼 수도, 우리를 해코지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베니코는 덧붙였다.

 

“게다가 여기저기 다니다 보면 다양한 정보도 모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정보 말입니다.”

“냐아앙?”

“네, 그렇지요.”

 

베니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만약 그 연구소인지 뭔지가 정말로 우리 〈전천당〉이 하는 일에 참견하는 거라면……, 그리고 그게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때는 이 베니코도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사옵니다. 뭐, 웬만한 일이라면 짓궂은 장난쯤으로 여기고 눈감아 줄 수도 있고요.”

 

그렇게 말하고서 베니코는 허리를 살짝 숙여 여행용 가방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틈을 타 검은 고양이 스미마루가 베니코의 어깨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이런, 스미마루. 이번에는 스미마루에게 가게를 지켜달라고 부탁드릴 참이었습니다만…… 표정을 보아하니 저랑 같이 가실 생각인가 보군요. 어쩔 수 없지요. 그럼 같이 가 보실까요?”

 

베니코는 스미마루의 턱을 살살 간질여 주고는 마네키네코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가게를 잘 지켜 주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기러기〉를 보내시고요.”

“냐아아앙.”

 

마네키네코들이 잘 다녀오라며 베니코와 스미마루를 배웅했다.

 

 

 

열두 살 아이네는 입이 근질근질했다. 친구 아유미의 비밀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오늘 학교에서 아유미가 귓속말로 말해 주었다.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사실, 나 유마 좋아해.”

“뭐야, 장난치지 마! 진심이야?”

 

아유미가 갑자기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아이 이야기를 꺼내자 아이네는 눈을 반짝거렸다. 아이네는 아유미의 두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작게 속삭였다.

 

“유마를 좋아한다니 무슨 말이야? 언제부터? 무슨 일이 있었는데?”

“너도 참, 하나씩 물어봐."

 

발그레해진 얼굴로 아유미는 왠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실은 얼마 전부터 관심이 생겼어. 유마가 엄청 다정하잖아. 키도 크고. 한번 괜찮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마음이 가더라.”

“뭐?”

“그래서 미리 말해 두는데, 아이네 너!”

 

아유미는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서 말을 이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으니까 유마한테 관심 가질 생각 마. 알았지?”

 

‘그럼 그렇지. 이 말을 하려고 비밀을 털어놓았구나.’

 

아이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어차피 유마는 내 스타일 아니거든. 그러니까 걱정 마.”

“어머, 너 말이 심한 거 아냐?”

“그럼 뭐라고 해 줄까?”

“어휴, 아이네 넌 은근히 쌀쌀맞다니까. 그리고 이건 비밀이야. 다른 애들한테 절대 말하면 안 돼. 약속해! 만약 약속 어기면…… 나 정말 안 참아!”

“그걸 내가 왜 말하냐? 날 뭘로 보고! 비밀은 반드시 지킨다고!”

 

그렇게 찰떡같이 약속해 놓고서 학교 수업이 다 끝나갈 무렵 아이네는 누군가한테 그 말을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아, 말하고 싶어! 너무너무 말하고 싶어! 아유미가 유마를 좋아한다고 마구 떠들고 싶어!’

 

하지만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누구한테든 비밀을 털어놨다가 아유미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크게 싸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더는 못 참겠어. 어떡하지? 집에 가서 엄마한테만 말할까? 아냐, 안 돼, 안 돼.’

 

엄마는 아이네보다 훨씬 더 수다쟁이다. 엄마에게 말했다간 학부모회에서 만난 다른 엄마들한테 모조리 이야기해서 결국 반 아이들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유미는 정말 아이네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아이네는 자기가 이렇게 입이 가벼웠나 싶어서 적잖이 놀랐다.

 

“아, 근질근질해! 입에 자물쇠라도 채울 수 있으면 좋겠어! 아니면 지퍼나 접착제? 어쨌든 비밀을 지킬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어.”

 

진심으로 그렇게 바랐을 때다.

 

“저, 거기 꼬마 아가씨.”

 

누군가 부르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아이네는 뒤를 돌아보았다.

 

좁은 공터에 아주 신기한 모습을 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예쁜 유리구슬이 달린 비녀를 잔뜩 꽂고, 옛날 동전 무늬가 새겨진 자주색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주 크다. 아이네의 아빠보다도 키가 크고, 몸집도 듬직했다.
 

아주머니는 손에 캔 커피를 들고 있었고, 옆에는 낡고 큼직한 여행용 가방이 놓여 있었다. 게다가 그 옆에서는 검은 고양이가 접시에 담긴 우유 같은 것을 할짝거리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이리 와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이네에게 손짓했다. 평소라면 아이네는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뒤도 돌아보지말고 도망치라고 늘 단단히 일러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도망치기는커녕 아주머니의 미소에 이끌려 아이네는 공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주머니 코앞에 서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아주머니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몸집이 컸다. 아주머니는 그 큰 몸을 굽혀서 아이네를 들여다보더니, 기묘한 말을 중얼거렸다.

 

“스미마루와 잠깐 쉬려던 참이었는데, 그사이에 손님을 이렇게 뵙게 되었군요. 이 또한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르겠사옵니다.”

“저, 저어…….”

“아, 이런! 실례했사옵니다. 아무래도 꼬마 아가씨가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으십니까? 무엇이든 말씀해 보십시오.”

 

마음에 스며드는 듯한 묵직한 목소리에 아이네는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입을 벌려 바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비밀을……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주머니는 “오호!” 하고 기뻐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군요! 그래요, 비밀을 안고 있으면 참으로 지키기어렵지요. 좋사옵니다. 마침 손님한테 딱 맞는 상품이 있으니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주머니는 옆에 있던 여행용 가방을 탁 열었다. 가방 안을 들여다본 아이네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여행용 가방 안에는 아이네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과자와 장난감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멜로디 캔디〉, 〈점술 캔〉, 〈해야 떠라 레몬〉, 〈천벌 뽑기〉, 〈자장자장 모나카〉, 〈파이어 스티커〉, 〈프렌드 도넛〉, 〈인기 통통 떡〉, 〈귀족 마시멜로〉.

하나같이 너무나 매력이 넘쳐서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아이네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아주머니가 여행용 가방 안에서 작고 하얀 플라스틱 상자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만한 크기에, 높이는 1센티미터 정도다. 상자 뚜껑에는 열쇠와 자물쇠 그림이 나란히 그려져 있고, 자두처럼 새빨간 글씨로 ‘시크릿 알약’이라고 쓰여 있다.

 

아이네는 조그맣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걸 보는순간 알았다. 자기를 위한 과자라는 걸. 어떻게 해서든 꼭 갖고 싶었다.

 

눈을 반짝이며 〈시크릿 알약〉을 바라보는 아이네에게 아주머니는 살며시 속삭였다.

 

“이 〈시크릿 알약〉은 비밀을 지키고 싶을 때 안성맞춤인 사탕이옵니다. 가격은 100엔입니다. 어떻사옵니까?”

 

물론 아이네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살게요!”

 

그렇게 말하고서 아이네는 얼른 가방 안에 손을 넣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해 100엔 동전 한두 개쯤은 늘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 100엔을 내밀었더니 아주머니는 빙긋 웃었다.

 

“네, 네, 오늘의 행운 손님. 1998년에 발행한 100엔 동전이 맞사옵니다. 자, 〈시크릿 알약〉을 받으십시오.”

“고맙습니다! 우아, 신난다!”

“한 가지 비밀에 〈시크릿 알약〉을 한 알씩 드십시오. 그러다 보면 점점 비밀을 지키는 습관이 몸에 밸 것이옵니다. 하지만 비밀이라고 해서 언제나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수수께끼 같은 말을 중얼거린 다음 아주머니는 검은고양이 쪽을 돌아보았다.

 

“스미마루, 이제 다 드셨습니까?”

“냐아.”

“그럼 치우겠습니다.”

 

아주머니는 검은 고양이가 핥던 접시를 쓱쓱 닦아 여행용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고양이를 자기 어깨에 태운다음 “그럼 실례하겠사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아이네에게서 멀어져 갔다.

 

아이네는 이미 아주머니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손에 쥔 〈시크릿 알약〉만 바라봤다.

 

‘근사해. 정말 오로지 나만을 위한 사탕이라는 느낌이 팍팍 들어. 조금 먹어 볼까? 물론 이런 사탕 하나로 비밀을 지키게 된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지만 어쨌든 먹어 보자.’

 

아이네는 〈시크릿 알약〉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동그란 알약 모양의 자주색 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크기는 살구씨 정도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표면에 알파벳 ‘S’ 자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가위표가 겹쳐져 있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냄새가 코를 살살 간질여서 입에 금방 침이 고였다. 아이네는 얼른 한 알 집어서 입 안에 넣었다.

 

“와, 맛있어!”

 

알약 사탕은 아이네가 좋아하는 매실 맛이었다. 새콤한 데다 살짝 짭조름해서 맛이 기가 막혔다.

 

자기도 모르게 한 알 더 먹어 치우고 또 한 알을 더 먹으려고 손을 뻗었을 때다.

 

“아이네 맞지? 거기서 뭐 해?”

 

느닷없이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아이네는 기겁해서 돌아봤다. 같은 반 친구인 시즈카가 이상하다는 듯이 아이네를 보고 있었다.

 

아이네는 얼른 〈시크릿 알약〉을 주머니에 감추고 웃어보였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좀 전에…… 커다란 도마뱀이 이쪽 공터로 들어가길래 쫓아왔어.”

“도마뱀? 웩, 징그러워! 선생님이 한눈팔지 말고 곧장 집에 가라고 하셨잖아. 가는 길까지 같이 가자.”

“응.”

 

아이네는 시즈카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때 시즈카가 눈을 반짝이며 속삭였다.

 

“근데 너 아까 교실에서 아유미랑 속닥거리더라. 둘이 무슨 얘기 했어?”

 

‘어떡해. 난처해졌어.’

 

아이네는 마음이 조금 초조해졌다. 시즈카가 그렇게까지 물으니 도저히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다. 안 그래도 누구한테든 나불거리고 싶어서 안달인데 큰일이다.

 

‘어떡하지?’

 

당황하던 아이네는 문득 깨달았다.

 

‘어어? 떠들고 싶은 마음이 안 들잖아!’

 

방금 전까지 그렇게 자기를 괴롭히던 비밀의 무게가 말끔히 사라졌다.

 

‘정말로 〈시크릿 알약〉 덕분일까? 그런 과자가 진짜 효과가 있단 말이야?’

 

이런 생각에 빠져 있는 아이네에게 시즈카가 물었다.

 

“아이네, 너 오늘 좀 이상해.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으응, 미안.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아, 아유미하고 말이지? 별말 안 했어. 그냥 내일 급식에 싫어하는 거 나오면 서로 바꿔 먹자는 얘기였어.”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덕분에 아유미의 짝사랑은 아이네의 마음속에 고이 머물게 되었다.

 

아이네는 자기가 친구의 비밀을 지켰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시즈카는 “뭐야? 그런 거였어?”라며 아이네 말을 믿고 넘어갔다.

 

집 앞에서 시즈카와 헤어진 뒤 아이네는 〈시크릿 알약〉을 꺼내서 가만히 보았다.

 

상자를 뒤집어 봤더니 바닥 부분에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시크릿 알약〉

‘시크릿 알약’만 있으면 비밀 지키기 성공! 어떤 비밀도 ‘시크릿 알약’ 한 알만 먹으면 지킬 수 있다. 비밀 한 가지에 알약 사탕 한 알! 맛있다고 계속 먹으면 먹은 알약 사탕 수만큼 비밀을 지켜야 하니 주의할 것.

 

예상대로 〈시크릿 알약〉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아이네는 조금 불안해졌다.

 

“참, 아까 두 알을 한꺼번에 먹어 버렸잖아……. 그 아주머니가 한 가지 비밀에 한 알씩 먹으라고 말했는데 맛있어서 그만……. 뭐, 괜찮겠지? 어차피 다음 비밀도 지키게 된다는 거잖아? 그런 거라면 문제없지.”

 

어쨌든 이제 아유미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비밀을 말하고 싶어서 술렁이던 마음속 외침이 사라지자 기분이 아주 산뜻했다.

 

다음 날, 아이네는 〈시크릿 알약〉을 주머니에 몰래 숨긴 채 즐겁게 학교로 갔다.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일이 또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때 〈시크릿 알약〉이 없으면 곤란할 테니까.”

 

그렇게 스스로 이유를 들며 교실에 들어서던 아이네는 깜짝 놀랐다.

 

아이네는 평소 부지런을 떠는 성격이라 언제나 반에서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한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아유미가 일찍 와 있었고, 행동거지도 어딘가 수상쩍었다. 자기 책상이 아닌 다른 아이의 책상 안을 들여다보고는 손을 넣는 게 아닌가.

 

“아유미, 너 뭐 하고 있어?”

“꺄아악!”

 

아이네가 말을 붙이는 순간 아유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펄쩍 뛰었다. 몸을 돌려 아이네인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아이네! 왜 사람을 놀라게 하니?”

“내가 놀라게 한 게 아니라 네가 제풀에 놀란 거잖아! 그건 그렇고 거기 유마 자리 아냐? 뭐 하고 있었어?”

“아, 아니…….”

 

아유미는 묘하게 긴장한 표정으로 얼른 손을 뒤로 감추었다.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자 아이네는 감이 딱 왔다.

 

“너, 유마 물건을 가져갔지? 뭘 꺼낸 거야?”

“아니라니까. 그런 짓을 내가 왜 해?”

“거짓말. 그럼 손에 들고 있는 거 보여 줘.”

“…….”

 

마침내 아유미는 포기한 듯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에는 작은 칼이 들려 있었다. 길이는 20센티미터쯤 되지만, 칼날이 날카롭게 서 있어서 진짜 칼이랑 똑같았다.

 

이 칼이라면 아이네도 본 적이 있다. 편지 봉투를 열 때 쓰는 종이칼인데, 유마가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다.

 

“아유미 너!”

“아, 아니, 어쩔 수 없었어! 사랑 점을 보고 싶은데 그러려면 유마의 소지품이 필요하단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 물론 나중에 도로 가져다 놓을 생각이었어. 그러니까 제발 비밀로 해 줘! 부탁이야! 이 일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우리 친구잖아.”

 

애원하는 아유미의 눈이 무섭게 번득였다. 아이네는 고민 끝에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고 어렵사리 약속을 하고 말았다.

 

조금 뒤 반 아이들이 하나둘씩 잇따라 교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아이네와 아유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인사를 건넸다.

 

마침내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여느 날처럼 수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네는 조마조마했다. 아유미가 한 짓이 자꾸만 생각나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좋아해서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소지품을 멋대로 가져가는 건 나쁜 행동이다. 유마는 종이칼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아유미가 빨리 사랑 점인지 뭔지를 끝내고 종이칼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아야 할 텐데.’

 

아이네는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져서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비밀을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어제 〈시크릿 알약〉을 한 알 더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네는 마음이 뒤숭숭했지만 한편으로는 〈시크릿 알약〉의 효과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유마가 종이칼이 없어진 걸 알아차린 것이다.

 

교실이 순식간에 발칵 뒤집혔고, 곧바로 한 아이가 범인으로 의심을 받았다.

 

하루토였다.

 

하루토가 평소 유마의 종이칼을 탐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자기가 모은 캐릭터 카드와 바꾸자고 끈질기게 유마를 졸라 댔기 때문이다.

 

“네가 가져갔지?”

 

화가 나서 얼굴이 시뻘게진 유마가 다짜고짜 하루토에게 따져 물었다.

 

“아냐! 나 아니라고!”

“거짓말하지 마! 빨리 내놔, 이 도둑놈아!”

“내가 안 가져갔다니까! 미, 믿어 줘!”

 

하루토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하루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이네는 자기도 모르게 아유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유미는 모른 척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대로 시치미를 떼고 하루토에게 덮어씌울 작정인 모양이다.

아이네는 아유미를 노려보았다. 따가운 눈초리를 느꼈는지 아유미가 아이네 쪽을 돌아보며 멋쩍게 웃었다.

 

“하루토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하는 아유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아이네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더는 안 되겠어. 아유미가 내 친구이긴 하지만 이렇게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순 없어.’

 

아이네는 “하루토가 가져간 게 아니야.”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혀가 마비라도 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연거푸 시도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말이 나오지 않아 쩔쩔매고 있는 사이 선생님이 와서 유마와 하루토를 교무실로 데리고 갔다.

 

아이네는 입술을 깨물며 어찌 된 일인지 곰곰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시크릿 알약〉의 힘일 것이다. 비밀을 말하고 싶은 마음을 없앨 뿐만 아니라 절대로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다.

 

‘내가 비밀을 지키면 하루토가 도둑으로 몰려. 그건 옳지 않잖아. 어떡하면 좋을까?’

 

아이네는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주머니에서 〈시크릿 알약〉을 꺼냈다. 어쩌면 상자 어딘가에 알약의 효과를 없애는 방법이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상자를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그러나 알고 싶은 내용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아이네는 실망하며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알약 사탕이 잔뜩 남아 있었다. 마법 같은 이 사탕이 어제는 고마웠는데 오늘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아아, 왜 두 개씩이나 먹어서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손가락 끝으로 알약 사탕을 꾹꾹 누르고 있었을 때다. 사탕이 푸슬푸슬 부스러지면서 그 밑으로 종이가 보였다. 무언가 적혀 있었다.

 

아이네는 얼른 종이를 잡아당겼다. 얇은 한지에 이런글이 쓰여 있었다.

 

〈시크릿 알약 사용 방법〉

알고 있는 비밀을 종이에 적어서 누군가에게 보여 주면 알약의 효과는 사라진다. 그러나 별로 권장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럴 경우, 당신의 비밀 한 가지가 들통나기 때문이다. ……

 

거기까지 읽고 아이네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아이네한테도 비밀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바지에 오줌을 싼 일이라든가, 사실은 콧구멍 후비는 걸 좋아한다든가…….

 

하지만 이 가운데 어떤 비밀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내 비밀 한 가지를 반 아이들한테 들키게 된다고?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런 벌을 받아야 해? 내가 뭘 위해서 거짓말이라고 털어놓겠어? 하루토를 위해서? 아냐, 하루토가 불쌍하긴 하지만 도저히 안 되겠어. 진짜 도둑은 따로 있으니까 다들 곧 진실을 알게 될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아이네는 교실로 돌아갔다. 교실은 흥분한 아이들의 목소리로 떠들썩했다.

 

“난 하루토가 언젠가 그럴 줄 알았어.”

“걔 말고 달리 또 누가 있겠냐?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하지만 가방에도 없고 책상 안에도 없잖아!”

“잠깐! 너희들, 하루토 물건을 함부로 뒤지고 그러면 안 되지!”

“뭐 어때? 하루토는 유마 물건을 훔쳤는데.”

“맞아. 우리가 찾아내서 유마한테 돌려주자. 유마가 안쓰럽잖아.”

 

되는대로 떠들어 대는 반 아이들을 보고 아이네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아이들은 이미 하루토를 도둑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아이네는 아유미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아유미가 여자아이들 몇 명과 모여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역시 하루토였구나. 친구 물건을 훔치다니 정말 못됐네!”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아유미의 말을 듣는 순간 아이네는 안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말이야! 자기가 가져갔으면서! 됐어! 아유미 같은 애는 친구도 아니야. 저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일 줄이야!’

 

마음을 정한 아이네는 자기 자리로 가서 공책을 펼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소동에도 꿋꿋이 혼자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는 아이네가 이상했는지 시즈카가 다가와 물었다.

 

“아이네, 무슨 일이야?”

 

시즈카는 아이네의 공책을 들여다보고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말도 안 돼……. 이, 이게 저, 정말이야, 아이네?”

 

시즈카의 고함을 듣고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왜 그래?”

“뭐야? 뭔데?”

“자, 잠깐 이것 좀 봐. 아이네가 쓰고 있던 거야.”

 

모두 아이네의 공책을 들여다보았다.

 

“뭐? ……유마 물건을 훔친 게 하루토가 아니라 아유미라고?”

“거짓말 마. ……서, 설마 진짜야?”

“아유미가 왜?”

 

아이들의 눈길이 일제히 아유미에게 쏠렸다. 아유미는 얼굴이 창백해지면서도 한사코 아니라고 우겼다.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그런 짓을 왜 해? 난 종이칼 같은 거 갖고 싶지도 않거든.”

 

그때 남자아이 하나가 잽싸게 아유미 책상 안을 들여다보았다.

 

“여기 있다! 정말로 있어!”

 

유마의 종이칼이 아유미 책상에서 나왔다.

 

“약속했잖아! 약속했으면서!”

 

아이네는 울부짖는 아유미를 조용히 마주 보았다.

 

“약속했었지. 하지만 하루토가 도둑 누명을 쓰게 생겼는데 가만있을 순 없잖아. ……난 잘못한 거 없어.”

 

 

 

아유미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아이네는 이제 아유미가 울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자 힘이 쑥 빠졌다.

 

‘아유미랑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순 없겠지. 그건 괜찮아. 하지만 〈시크릿 알약〉의 경고는 겁나는걸. 언제일까? 언제 내 비밀이 들통날까?’

 

비밀이 들통나는 순간을 떠올리며 아이네는 몸을 덜덜 떨었다.

 

그러나 아이네의 비밀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아이네가 끝까지 읽지 않아서 미처 몰랐지만 〈시크릿 알약〉 사용 설명서에는 이어지는 글이 더 있었다.

 

다만, 세상에는 털어놔야 마땅한 비밀도 있는 법.

그런 비밀을 밝힌 상황이라면 알약의 효과를 없애더라도 당신의 비밀은 지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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