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북

***프롤로그 

 

 깊은 밤식당 구석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아직 젊은 사람인데얼굴은 푸석푸석하고 등은 노인처럼 굽었다눈빛은 탁한 데다 원망마저 가득 담겨 있다. 

 

 

 다른 손님들은 그 남자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종업원들도 되도록 그 남자 곁에는 가지 않았고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했다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뭘 봐나한테 불만 있어?” 하고 괜히 시비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차라리 집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을 일이지…….

 

 그러나 남자는 매일 밤 이 식당에 와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싸구려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한참이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데 그날 밤은 달랐다.

 어떤 손님이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기타지마 씨 맞지요? ‘카리스마 미용사라는 이름으로 한때 유명했던 바로 그 기타지마…….”

 

 “크큭나를 그렇게 불러 주다니…… 꽤 오랜만이군지금은 보시다시피 완전히 ‘폐인 기타지마가 됐는데 말이야크크크.”

 

 기타지마는 “당신 누구야?”라고 쏘아붙이며 상대를 올려다보았다고급스러운 양복을 입은 50대 남자갸름하고 멀끔한 얼굴에 말투도 나긋하다은행 지점장 아니면 가게를 오래 운영해 온 사장처럼 여유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남자는 빙긋 웃었다.

 

 “내 소개보다는 당신 이야기를 듣고 싶소만아주 흥미로운 얘길 떠들고 다닌다 들었소카리스마 미용사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것도그 뒤에 교통사고를 낸 것도 전부 다 어떤 과자 가게 때문이라면서요?”

 

 “맞아사실이야!”

 

 퉁퉁 붓고 창백하던 기타지마의 얼굴이 분노로 확 달아올랐다.

 

 “제길이 꼴이 된 건 다 과자 가게 때문이야그 가게가 내내 인생을 이렇게 망가뜨리고 말았어그때 그 과자를 먹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는 잘나가는 미용사로 승승장구했을 거라고!”

 

 “그 이야기내게 자세하게 들려주지 않겠소?”

 

 “……당신정말 듣고 싶어?”

 

 “물론이오꼭 듣고 싶소.”

 

 “……정 그렇다면 밥이라도 사든가그럼 이야기해 줄 수도 있는데?”

 

 입술 한쪽을 씰그러뜨리며 야비하게 웃는 기타지마에게 남자는 1만 엔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부족하면 더 주겠소그러니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얘기해 주시게어떻게 그 과자 가게에 가게 되었는지그리고 무엇을 샀는지.”

 

 기타지마는 지폐를 획 낚아채더니 주절주절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으으흣추워라!”

 

 다이치는 이를 딱딱 떨면서 하얀 입김을 후욱후욱 토해 냈다.

 

 지금 기온은 0도쯤 될 것이다한밤중이라 그런지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드는 것 같았다손가락과 발가락은 곱아들고 귓불과 코끝은 시리다 못해 얼얼했다.

 

 다이치는 까치발을 하고서 저만치 앞을 바라다보았다길게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없었다.

 

 지루해진 다이치는 옆에 있는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나는 집에 가면 안 돼요요즘 세상에 누가 새해 라고 기도하러 신사에 가냐고요내 친구들은 아무도 안 간다니까요!”

 

 그렇다다이치는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멀지 않은 신사에 새해 소원을 빌러 왔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들떠서 어떤 새해가 펼쳐질 지 기대하며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그 틈에서 다이치만 혼자 못마땅한 얼굴로 뿌루퉁히 서 있다.

 

 다이치는 중학교 3학년이제 곧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를 몸이다우수한 학생들이 모인다는 사립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벌써 오래전부터 시험 준비를 해 왔다시험 준비를 하느라 학원에서 시달리고친구들이랑 노는 것도 금지되었다.

 

 다이치는 쌓여만 가는 스트레스를 견디기 힘들었다애초에 공부를 썩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왜 좋아하지도 않는 공부를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그런 다이치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아빠와 엄마는 잔소리를 자꾸 해서 부담만 더 주었다. “다이치조금만 더 노력하자.”, “고등학교에 붙을 때까지 참아야지어쨌든 좀 더 노력해 봐.”라면서…….

 

 그런데 이번에는 다이치를 새해 기도 행사에 억지로 데려왔다.

  

 ‘아니나한테 일분일초도 아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으면서하여튼 어른들은 뭐든 자기 맘대로 한다니까.’

 

 다이치는 정말 화가 났다.

 

 “응괜찮죠아빠이렇게 줄 서느라 시간 낭비할 바에 집에 가서 한 줄이라도 더 공부하는 게 입시에 훨씬 도움이 되잖아요!”

 

 “다이치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가 엄한 목소리로 다이치를 타일렀다.

 

 “새해잖아. 1년을 시작하는 날이라고의미 있는 날이니까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도 하고 소원도 빌고 그래야지안 그래?”

 

 “아빠 말씀이 맞아게다가 너 입시도 코앞인데 시험에 철컥 붙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든든하고 좋잖아.”

 

 엄마까지 거드는 바람에 다이치는 맥이 빠졌다.

 

 ‘치엄마랑 아빠 왜 저러셔평소에는 신사 같은 데 가 지도 않으면서신께서 아무리 너그럽다고 해도 필요할 때만 찾는 사람의 소원은 못 들은 척할걸?’

 

 “이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엄마 아빠 탓이에요.”

  다이치는 심술 난 말투로 우물거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행렬은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다그래도 마침내 다이치 차례가 다가왔다새해 기도에는 이런저런 예법이 있는 모양인데다이치는 어떻게든 빨리 끝내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복전함에 동전을 넣고 얼른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시험에 쉽게 붙어서 좀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주세요제발요.”

 

 다이치는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소원을 중얼거렸다어서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다반짝 빛나는 금색의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어어?”

 

 다이치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만 금색 고양이였다그 고양이는 복전함 안에서 불쑥 기어올라 와서는 생쥐같이 잽싸게 사당 뒤쪽으로 뛰어갔다뒷다리로 서서 사람처럼 두 발로 뛰어가는데하물며 옆구리에는 100엔짜리 동전을 끼고 있었다.

 

 “저저건…… 방금 내가 넣은 동전 아냐?”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이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몸을 움직였다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뛰어가는 다이치를 보고 엄마 아빠가 소리쳤다.

 

 “다이치!”

 “어디 가는 거야?”

 “금방 올게요친구를 봤어요.”

 “어머그래엄마랑 아빠는 매점에서 차 마시면서 몸 좀 녹이고 있을 테니 그리로 와.”

 “알았어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이치는 크게 대답했다다이치 머릿속에는 온통 금색 고양이 생각밖에 없었다.

 

 ‘그 신기한 고양이어디로 갔지꼭 잡고 싶은데…….’

 

 다이치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가 간신히 사당 뒤쪽으로 갈 수 있었다.

 

 도착한 곳은 어둡고 아주 고요했다사당 건물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앞쪽은 수많은 사람들이 복닥거리고 있다는 것이 꼭 거짓말 같았다마치 완전히 딴 세상에 오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다이치는 마음을 졸이면서 고양이를 찾아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펴보았다그리고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좀 더 안쪽으로 숲 입구에 작은 이동식 가게가 있었기 때문이다가게에는 커다란 등이 달려 있었는데둥근 등갓에 ‘전천당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얼핏 보기에도 근사한 과자와 장난감이 가득한 곳이었다〈감사 붕어빵〉〈인연 주먹밥〉〈금전운 사과〉〈길 안내 카드〉〈축하해 파이〉〈복이 찰싹 찹쌀떡>, 〈소원 전병〉 등등 어쩐지 운수가 술술 풀릴 것 같은 과자들이었다.

 

 이동식 가게 옆에 한 아주머니가 서 있었다자줏빛 바탕에 옛날 동전 무늬가 새겨진 기모노를 입고반들거리는 검은색 모피 목도리를 목에 둘렀다몸집은 말도 안 되게 크고키도 다이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것 같았다.

 

 보동보동한 얼굴은 복스럽고 붉은 입술은 우아한데 머리카락은 하얗게 셌다윤이 나고 반짝거리는 하얀색이라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보였다또 머리에 여러 개 꽂은 유리구슬 비녀들도 알록달록 빛나고 있었다.

 

 어쨌든 ‘평범과는 거리가 먼 아주머니였다딱 봐도 범상치 않은 사람이란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다이치는 엉겁결에 뒷걸음질을 치려다가 순간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아주머니 어깨에 아까 보았던 금색 고양이가 오도카니 앉아 있는 게 아닌가고양이는 100엔짜리 동전을 움켜쥐고서 다이치에게 “이리 와어서 오라고.” 하듯이 손짓했다.

 

 다이치는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갔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주머니 코앞이었다가까이에서 본 아주머니는 훨씬 더 크고상대를 꼼짝 못 하게 하는 기운이 감돌았다그러나 그런 분위기와는 다르게 아주머니는 떨고 있는 다이치를 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어서 오십시오새해 첫날 행운의 손님.”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아주머니는 알쏭달쏭한 말을 이어 갔다.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손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길가에 벌여 놓은 이동식 가게이지만 그래도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전천당〉입니다손님께서 만족하실 물건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이 아주머니아무래도 기념품 가게 주인인 모양인데소원이니 원하는 걸 들어준다니 너무 과장되게 말하잖아.’

 

 평소의 다이치였다면 ‘딴지 스위치를 켜고서 “그렇다면 세계 정복을 부탁해요왜요뭐든 다 들어준다면서요.”라며 이죽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상하게 장난칠 마음이 들지 않았다다이치는 웬일로 순순히 자기 소원을 털어놓았다.

 

 “제가 다음 달 8일에 입학시험을 보는데요이제 공부라면 아주 지긋지긋해서……. 그러니까 좀 편하게 시험에 붙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고서 다이치는 얼굴을 붉혔다.

 ‘지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아주머니가 어처구니 없어하시겠네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편하게 시험에 붙는 게 소원이라니내가 생각해도 한심하다한심해.’

 

 그러나 아주머니는 비웃거나 무시하지 않았다오히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다음 달 8일에 입학시험을 치르신다고요……그렇다면 이런 물건은 어떻사옵니까?”

 

 아주머니는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손길로 판매대 위에서 무언가를 집어 다이치에게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부적이었다직사각형 종이에 굵은 글씨체로 ‘낙타 부적이라고 쓰여 있고글자 아래에 낙타 그림이 그려져 있다부처님처럼 양손을 모으고 연꽃 위에 앉아 히죽 웃고 있는 낙타다금색으로 칠해져 있어서 정말로 뭔가 축하할 만한 기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물건은 〈편한 낙타 부적〉이옵니다부적 뒷면에다 편해지고 싶은 것편하게 이루고 싶은 것을 써넣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소원을 이루어 주지요지금 손님에게 딱 필요한 물건인 듯싶은데어떻사옵니까?”

 

 다이치는 아주머니가 내민 〈편한 낙타 부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갑자기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뭐야한낱 종이 쪼가리일 뿐이잖아!’

 

 일부러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 갖고 싶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저히 못 참겠다너무 갖고 싶어사야겠어!’

 

 간절한 마음이 행여나 새어 나올세라 조심하면서 다이치는 작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물었다.

 

 “살게요얼마예요?”

 “값은 이미 치르셨사옵니다.”

 “네?”

 “여기이 동전이옵니다.”

 

 아주머니는 자기 어깨에 걸터앉은 금색 고양이를 가리켰다고양이는 여전히 100엔짜리 동전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손님께서 아까 복전함에 넣으신 동전입니다. 1975년에 발행된 이 100엔짜리 동전이 바로 오늘의 행운 동전이지요.”

 

 “흐흐음그렇군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이치는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그렇습니다혹시나 해서 다짐을 받아 두려 하는데손님의 소원을 이루는 대가로 이 동전을 받아도 괜찮겠습니까?”

 

 “조좋아요그럼 이 〈낙타 부적〉은 제가 가져도 된다는 거죠?”

 

 “네물론이옵니다다만 편하게 이루는 것이 반드시 행운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는 법편함이 있으면 괴로움도 있다는 점을 꼭 염두에 두고 깊이 생각한 뒤 사용해 주십시오.”

 

 “네알았어요알았다고요.”

 

 다이치는 다급하게 대답하면서 〈편한 낙타 부적〉을 텁석 받아 들었다아주머니의 당부 같은 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편한 낙타 부적〉에서 어떤 신기한 힘을 느꼈다그런 게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말로 소원이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다이치는 가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이치는 자기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주머니에서 〈편한 낙타 부적〉을 꺼냈다밝은 방에서 봐도 부적은 마력 같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그 힘이 아까보다 한층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부탁이야나를 합격시켜 줘아니그보다 난 더 이상 공부를 하고 싶지 않아!”

 

 진심을 담아 다이치는 부적 뒷면에 ‘시험 합격!’이라고 써넣었다그 순간 초조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거짓말같이 싹 사라졌다.

 

 아까만 해도 집에 와서 역사 연표를 외울 작정이었다물론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연표를 외우지 않으면 시험에서 엄청 애를 먹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서도 왠지 이제 암기 따위는 안 해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젠 공부 안 해도 돼애써 공부하지 않아도 가장 가고 싶었던 고등학교에 붙을 것 같아아니반드시 붙어.’

 

 단박에 마음이 편안해진 다이치는 그날부터 입시 공부에서 손을 놓았다.

 

 “공부하니까 방해하지 마세요.”

 

 부모님에게는 그렇게 말하고서 자기 방에 틀어박혀 만화책을 보고 게임을 하고…….

 

 다른 때 같았으면 ‘내가 생각해도 이건 너무 심한걸이제 슬슬 공부 좀 해 볼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그러나 〈편한 낙타 부적〉이 있어서인지 불안하지도 전혀 초조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시험 날이 되었다.

 

 다이치는 국어 시험지를 받아 쭉 훑어보고는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기 때문이다한 달 반도 넘게 공부를 게을리했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제발 부탁이야〈편한 낙타 부적〉나 좀 살려 줘!’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연필을 손에 쥔 다이치.

 

 다음 순간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답안지에 사각사각 답을 써 내려갔다무엇을 쓰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마말도 안 돼!”

 

 다이치는 참지 못하고 조그맣게 중얼거리고 말았다그다음 시간은 영어수학 시험으로 이어졌는데번번이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다이치가 두 손 들고 포기할 정도로 어려운 문제였지만 손이 제멋대로 정답을 쓱쓱 써 내려갔다당연한 결과라고 해야 할까다이치는 지원한 고등학

교에 멋지게 합격해 아무 탈 없이 편안하게 입학했다부모님은 몹시 기뻐하면서 다이치를 칭찬했고다이치는 콧대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우쭐댔다.

 

 “헤헤내가 정말 굉장한 물건을 샀구나앞으로도 잘 부탁해〈편한 낙타 부적〉!”

 

 다이치는 〈편한 낙타 부적〉을 가방에 넣어 두고 늘 지니고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시작된 고등학교 생활은 즐거웠다친구도 사귀고 축구 동아리도 너무너무 재미있었다동아리 활동이 없는 날에는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밖에서 놀기도 하며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지냈다.

 

 이래서 공부할 시간은 있을까물론 있을 리가 없었다.

 

 “괜찮아괜찮아나한테는 〈편한 낙타 부적〉이 있잖아!”

 

 다이치는 놀고 빈둥거리는 데 시간을 다 써 버렸다수업 시간에는 몰래 만화책을 보고 딴짓하고 자고……. 물론 집에 와서도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마침내 첫 중간고사 날이 찾아왔다.

 

 다이치는 기지개를 켜면서 자기 자리에 앉았다어제 밤늦게까지 인터넷을 하며 노느라 눈이 따끔따끔하고 졸려 죽을 지경이었다.

 

 ‘후딱 답을 써 버리고 종 칠 때까지 자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문제를 보지도 않고 샤프를 쥐었다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손이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이러지이럴 리가 없는데!’

 

 초조해진 다이치는 오른손을 쥐었다 펴기도 하고 탈탈 털기도 하면서 어떻게든 시험 문제의 답을 쓰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남은 시간은 15분 남짓그제야 다이치는 깨달았다오늘은 〈편한 낙타 부적〉이 힘을 발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그렇다면…….

 

 ‘마망했다!’

 

 다이치는 부랴부랴 시험 문제를 읽기 시작했다.

 

 다음 시간도 완전히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다이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스스로 문제를 풀었다.

 

 물론 시험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이토록 참담한 점수를 받은 적은 여태 한 번도 없었다.

 노발대발하며 꾸짖는 부모님에게 다이치는 간절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이번 시험 기간에 몸이 정말 안 좋았어요기말고사 성적은 반드시 올릴게요약속해요.”

 

 가까스로 부모님의 화를 가라앉히고 나서 다이치는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입시 때는 그렇게 술술 풀리더니 왜 갑자기 〈편한 낙타 부적〉의 효과가 사라졌을까어쨌든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되겠어부적을 판 아주머니한테 가서 이유를 물어봐야지!’

 

 다이치는 새해 기도를 하러 갔던 신사에 다시 가 보았다그러나 아주머니의 모습은 물론 신기한 과자가 잔뜩있던 이동식 가게도 눈에 띄지 않았다신사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그런 사람은 모르겠는데?”라는 대 답만 돌아왔다.

 

 막막해진 다이치는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 보았다아주머니 외모는 정말 눈에 띄게 독특했고게다가 팔던 과자는 더더욱 신기했으니까틀림없이 누군가는 그 아주머니를 알 것이다.

 

 

 [ 머리카락이 새하얗고자주색 기모노를 입은 아주머니를 찾습니다키는 180센티미터가 훌쩍 넘을 것 같고아주 특이한 과자와 장난감을 파는 사람입니다이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거나 아는 분은 댓글이나 쪽지를 부탁합니다. ]

 

 

 정보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댓글이 달렸다.

 

 

 [ 안녕하세요혹시 그 여자분이 ‘전천당이니 ‘베니코니 하는 이름을 말하지 않던가요그리고 말투도 독특하지 않았습니까? ‘~이옵니다.’ 하는 식으로요만약 그렇다면 당신이 찾는 사람은 제가 찾고 있는 사람과 동일 인물인 것 같습니다. ]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다이치는 얼른 댓글을 썼다.

 

 

 [ 맞아요그러고 보니 ‘전천당이라고 그랬어요그리고 말투도 ‘~사옵니다, ~이옵니다.’라고 했어요님도 그 아주머니를 찾고 있다고요? ]

 

 

 이번에는 곧장 쪽지가 왔다.

 

 

 [ 역시 같은 사람이었군요저도 계속 찾고 있던 사람입니다당신은 어디서 그 사람을 만났나요그 곳에서 무엇을 사셨습니까이것저것 정보를 교환하고 싶은데 만날 수 있을까요? ]

 

 [ 좋아요그런데 어디서 만나죠님과 제가 사는 곳이 많이 멀 수도 있고……. ]

 

 [ 괜찮습니다당신이 편한 곳으로 정하세요어디든 제가 가겠습니다. ] 

 

 

 이렇게 해서 다이치는 그 사람과 집 근처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일요일 낮 12시간 맞춰 약속 장소로 나온 사람은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였다나이는 쉰 살쯤 되었고 점잖아 보였다.

 

 남자는 다이치에게 다가오더니 싱긋 웃으며 자기를 소개했다.

 “안녕하신가나는 로쿠조라고 하네.”

 

 다이치는 적잖이 당황했다설마 이렇게 나이 많은 아저씨가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도 그 아주머니를 찾고 계신다고요과자를 샀는데 효과가 사라져 버려서 그러세요?”

 

 “아니아니야난 친구한테서 〈전천당〉 얘기를 듣고 그런 신기한 과자 가게라면 꼭 가 보고 싶었지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전천당〉에 갈 수가 있어야지거길 찾아가려면 어떤 규칙이 필요한 모양이야.”

 

 로쿠조는 그 규칙을 알아내기 위해 〈전천당〉에 가 봤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알아내셨어요저한테도 가르쳐 주세요!”

 

 “안타깝지만 지금은 정확히 모른다네아직 자료가 많이 부족해서그러니까 나한테 말해 보게다이치 군은 어떻게 〈전천당〉 주인을 만났나그리고 거기서 뭘 샀지자세히 들려줬으면 좋겠네아 참점심 아직 안 먹었지먹고 싶은 거 다 주문하게물론 내가 사겠네.”

 

 “그래도 돼요우아신난다!”

 

 다이치는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싼 스테이크와 디저트를 주문했다그리고 요리가 나올 때까지 로쿠조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새해에 신사에서 자기가 복전함에 넣은 동전을 금색 고양이가 들고 갔던 것고양이를 쫓아서 사당 뒤쪽으로 갔더니 거기에 이동식 가게가 있었고머리카락이 하얀 아주머니가 있었던 것아주머니가 ‘행운의 손님이라고 부르며 다가왔던 것.

 

 로쿠조는 그 모든 이야기를 노트북에 하나하나 기록했다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흐음그렇군그렇게 된 거로군〈전천당〉이 이동식 가게로도 운영된다는 얘기는 처음 들었네도움이 아주 많이 됐어정말 고맙네다이치 군.”

 

 “……저기저도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뭔가?”

 

 “아저씨한테 여쭤보는 게 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제가 산 〈편한 낙타 부적〉의 효과가 사라진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로쿠조는 팔짱을 끼었다.

 

 “내가 들은 얘기로는 〈전천당〉의 물건에는 부작용이 있다고 하던데?”

 

 “부부작용이요?”

 

 “그래마법처럼 근사한 효과를 발휘하기는 하지만 어떤 물건이든 일정한 규칙이 있고그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부작용이 생기는 모양이야.”

 

 “하하지만 저는 규칙 같은 거 하나도 어긴 적이 없거든요!”

 

 “정말 그럴까? ……혹시 지금 〈편한 낙타 부적〉을 갖고있나괜찮다면 한번 보여 주게.”

 

 “네여기요.”

 

 로쿠조는 다이치가 건넨 〈편한 낙타 부적〉을 샅샅이 살펴보았다그러더니 씩 웃었다.

 

 “이거로군.”

 

 “뭐뭔데요?”

 

 “잘 보게여기, ‘시험 합격!’이라는 글씨 아래에 조그맣게 ‘2 8이라고 쓰여 있잖은가.”

 

 “앗!”

 

 다이치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보니 날짜를 적었던 기억이 났다. ‘시험 합격!’만으로는 불안해서 그 아래에 입학시험을 치르는 날짜인 ‘2 8도 한 줄 더 써넣었다그걸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얼떨떨한 얼굴의 다이치와 반대로 로쿠조는 즐거워 보였다수수께끼를 풀어서 기쁜 모양이다.

 

 “과연 그랬군그래. 2 8일은 다이치 군이 고등학교 입시를 본 날이지그러니까 이 물건은 2 8일에만 효과가 있었을 테지그날이 아닌 다른 날에 치르는 시험에는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네부작용이 아니라 다이치 군이 스스로 불러온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지잉세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머릿속이 울렸다.

 

 다이치는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자기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했는지 울음이 터지려는 걸 꾹 참으며 다이치는 로쿠조를 보았다.

 

 “그럼 저는 어떡하면 좋죠?”

 

 “글쎄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유급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유유급이요? 1학년을 한 번 더 다녀야 한다고요?”

 

 “지금처럼 게으름을 피운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나는 그만 일어나 봐야겠어이따가 또 약속이 있어서 말이야다이치 군은 스테이크 잘 먹고 디저트도 천천히 즐기게나그렇지그래도 〈편한 낙타 부적〉은 계속 가지고 있는 게 좋겠어혹시 2 8일에 어떤 시험을 친다면 분명히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말일세!”

 

 그렇게 말하고서 로쿠조는 레스토랑을 떠났다.

 

 “아아……유급이 되면 엄마 아빠가 날 집에서 내쫓을 지도 몰라!”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다이치 앞에 스테이크가 나왔다그러나 먹고 싶은 마음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그 뒤로 다이치는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3개월 넘게 빈둥거렸던 여파는 컸다그동안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았던 터라 모든 과목이 엉망이었다.

 

 심지어 이 학교는 애초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다시 말해 다이치의 성적으로는 입학하기 어려운 학교였던 만큼 뒤처진 공부를 따라가기란 더더욱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유급만은 면하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다덕분에 기말고사에서는 아슬아슬하게 평균 점수를 넘을 수 있었다이 정도면 어쨌든 무사히 2학년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졸였던 마음이 스르르 풀리면서 다이치는 책상에 푹 엎드렸다.

 

 진짜 만만치 않았다억지로 힘들게 공부하는 통에 머리에서 뇌가 빠져나가 좀비가 된 것 같았다.

 

 “판판이 놀다가 벼락치기로 공부하는 거두 번은 못 하겠네다시는 이 지경이 되지 않도록 해야지다음에는…… 꼭…….”

 

 다이치는 그렇게 결심했다.

 

 

 

 이듬해 새해 첫날다이치는 다시 그 신사에 찾아갔다가지고 있던 동전이라는 동전은 다 복전함에 넣고서 다이치는 두 손을 모으고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그 이상한 아주머니를 다시 꼭 만나게 해 주세요한번 더 〈편한 낙타 부적〉을 살 기회를 주세요이번에는 잘 쓰겠습니다. ‘평생 공부가 쉬워지게 해 주세요!’라고 쓸게요그러니까 제발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소년은 “거참이제 그만 좀 끝냅시다!”라고 뒤에서 재촉하는 사람에게 밀려날 때까지 지치지도 않고 거듭 기도를 올렸다.

 

 

 

요시이 다이치 · 17 · 남학생 · 1975년 발행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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